번호 제 목 글쓴이 등록일 조회 65 “옴천면장 맥주 따르대끼” 이준 2007-05-11 2595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찌어찌 술판이 벌어졌다. 맥주는 아니다. 그 때 시골 술판은 막걸리가 대세였다. 한 사람은 따르고 한 사람은 잔을 들었다. 지금은 잔의 7부 능선까지 술을 채우는 게 예의로 통한다. 옛날엔 그랬다간 바로 퉁박 날아온다. 뭐든 ‘고봉’이 최고였다. 없이 살던 시절 잔은 넘쳐야 제 맛이었다. 그런데 눈치 없는 사람이 8부쯤 따르다 술병을 내려버렸다. 막걸리 대접을 들고 눈을 흘기던 사람은 곧바로 한마디를 던진다. “아따, 옴천면장 맥주 따르대끼 해 불구마이, 따뿍 채워사 술이 맛나제, 이 사람아.” 겁나게 궁금했다. 도대체 옴천은 어디며 거기 면장은 맥주를 어떻게 따르는 것일까. 사건의 정황으로 어렴풋이 추측은 가능했다. 옴천면장은 손이 큰 사람은 아니다. ▲ 옴천천 옆으로 있는 저 논들이 옴천의 유일한 평야다. 그리고는 전부 산이다. 이제 그 말은 ‘전국구’다. 전라도 일대를 벗어났다. 혹자는 압구정동에서 그 말을 쓰는 사람을 봤다고 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다. 어쨌거나 서울 사람도 쓴다. 경상도 토박이도 쓴다. 어떤 부산 사람은 어느 술판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 말을 뱉어놓고 옴천이 정말 이 나라에 있는 동네인가가 궁금해 지도와 한참 눈싸움을 했더란다. 결론부터 말한다. 싸움의 승자는 지도가 아니었다. 그렇다. 옴천은 확실히 있는 동네다. 지금도 어떤 사람은 옴천면장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강진군 옴천면이다. 엄청 신기하다. 지명에 ‘옴’가 들어가는 동네는 전국에서 여기 하나뿐이다. 확실하다. 만만하게 볼 동네는 절대 아니다. 전국구 유행어는 아무나 갖는 게 아니다. ▲ 옴천엔 그 흔한 경로당도 없다. 동네 노인들이 구멍가게에 모여 서 하루를 소일한다. ‘목리 이장하지, 옴천면장 안 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 말이 생긴 과정은 이렇다. 어느 날 군청에 손님이 왔다. 엄청 귀한 손님이었다. 그때 맥주는 무척 귀한 술이었다. 면장은 접대를 위해 면 소재지 가게를 모두 뒤졌다. 맥주가 고작 서너 병 나왔다. 면장은 일부러 거품을 최대로 많이 내서 술을 따랐다. 기록적이다. 한 병으로 여덟 잔을 따랐다. 참고로 맥주 한 병은 세 잔이 정량이다. 100% 신뢰하긴 어렵다. 그러나 사전 정보는 된다. 소재지에서 구할 수 있는 맥주가 그것뿐이라면 옴천은 엄청 궁색한 동네다. 사실이 그렇다. 강진군의 북쪽 끝이며 산간 오지다. 강진에서 규모가 가장 작은 면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전국으로 따져도 옴천은 무척 작은 면에 속한다. 옴천보다 면적과 인구가 작은 면 단위는 전국에 하나밖에 없다. 소재지에 식당도 없고, 당구장도 없고, 문방구도 없고, 이발소도 없다. 있는 건 없고, 없는 거 천지다. 이쯤 되면 정말로 여기가 면 단위가 맞을까 의심스럽다. 아무리 시골이 찌그러진 세상이라고 해도 이건 좀 심했다. ▲ 구멍가게에서 하루의 운세를 보는 옴천 주민. 어렵게 구멍가게 하나를 찾았다. 그런데 거짓말 조금 보태고 동네 노인 절반이 거기 모여 있었다. 하루 이틀 모인 눈치가 아니다. 이유인즉 옴천엔 그 흔한 노인정도 없다. 매일 2km 밖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구멍가게로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그가 겁나 없는 동네제, 외지 사람이 와서 밥 묵을 디도 없응께. 지금 옴천 인구가 팔백이나 될란가. 벌어묵고 사는 것은 농산디 맨 산이여. 들이 없어. 내가 평생 옴천서 살았는디 서른 이전까지 쌀밥 한 그릇을 제대로 못 묵어봐.” 채규만(69)씨의 말이다. 그 궁핍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말이 있다. ‘목리 이장하지, 옴천면장 안 한다’고 했다. 비유나 상징이 가미된 표현이 아니다. 실제로 그랬다. 시골이 한참 잘 나갈 때 옴천 지역의 가구수는 650여 호였다. 강진읍 목리는 400여 호 남짓, 그러나 비교가 안됐다. 탐진강 구강포를 끼고 있는 목리는 넓은 농토와 강을 가졌다. 더구나 강과 곧바로 연결된 강진만까지 영향권에 두고 있었다. 한때 목리에는 거대 상선이 드나들던 뱃길이 있었다. 돈이 굴러가는 규모는 옴천보다 목리가 훨씬 컸다. ▲ 옴천 면사무소, 그래도 관공서는 반듯하다. “옴천면장 맥주도 한 번 안 따라 봤으까?” 이제 증언만 남았다. 실제 “옴천면장 맥주 따르대끼”가 언제 어떻게 생겼고, 그 면장은 누구인지를 추적하는 일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옴천의 살아있는 역사들이 구멍가게에 전부 모여 있다. 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복잡하다. 박정권 초창기라는 사람도 있고 후반인 유신시절이라고 증언하는 이도 있다. 평균값을 내보면 어림잡아 35년쯤 전이다. 누구인지는 알지만 발설하기 곤란하다. 그 면장님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옴천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 말이 전국구로 퍼져 나간 게 자랑스러워 할 일은 못 된다. 일테면 그 말은 실제와 상관없이 궁색한 면 단위의 슬픈 상징으로 쓰였고, 지금도 그 의미로 돌고 돈다. 잘못하면 싸움 난다. 역시 ‘설(說)’은 설일 뿐이다. 와서 직접 들어보니 떠돌던 풍문과는 전혀 딴판이다. 35년 전쯤 어느 여름이었다. 옴천면장이 읍에서 열린 어떤 행사에 참석했다. 그 날 강진 지역의 모든 면장들이 다 모였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였다. 행사가 끝나고 술판이 벌어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런데 옴천면장은 마음이 급했다. 그때 강진과 옴천을 잇는 버스는 하루에 두 대뿐이었다. 아침에 한 번, 늦은 오후에 한 번. 버스를 놓치면 낭패다. 강진과 옴천은 대략 40리 길이다. 술판이 시작될 때 이미 버스 시간은 가까워지고 있었다. 옴천면장이 술병을 들었다. 저 멀리 옴천행 버스가 오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급하게 술을 따랐다. 냉장고도 없던 시절이다. 맥주는 온도가 높으면 거품이 더 많이 난다. 거기다 마음이 달려오는 버스로 달렸으니 오죽했을까. 한 병으로 여덟 잔을 따르고는 술병을 내려놓자마자 가게를 나와 버스에 올랐다. 넘치는 거품을 보면서 남은 면장들이 한 마디씩 했다. “옴천면장 맥주도 한 번 안 따라 봤으까?” “옴천은 바다도 없고, 농토도 좁고, 길도 험해. 도로 사정도 안 좋아, 상업도 안 되제. 옛날부터 강진서 젤로 궁한 동네여. 맥주가 없어서 거품나게 술을 따른 것이 아니고 그 냥반은 달려오는 차에 정신이 팔린 거 뿐이제. 근디 옴천이 워낙 없는 동네다 본께 말이 다르게 변해분 것이여.” 강성민(71)씨의 말이다. 그 말의 쓰임을 잘 살펴보면 유희의 기능이 크다. 그러니까 웃자고 건네는 농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옴천 사람들은 말의 뼈를 먼저 생각한다. 어느 술판에서 “옴천면장 맥주 따르대끼”를 외치며 당신이 웃을 때, 옴천은 아프다.